뒤늦게 나타난 신지의 친구들
루피가 외친다. 해적왕이 되겠어! 나루토가 외친다. 호카게가 되겠어! 이 두 사람의 씩씩함을 보고 있자면, 골방에 누워 워크맨을 듣고 있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외로운 소년 이카리 신지가 뜬금없이 떠올라 가슴 한 편이 아려온다. 만약에 신지가 루피와 나루토를 만났다면 어떤 녀석이 되었을까. 마치 루피를 만난 코비와 같이, 나루토를 만난 가아라와 같이 좀 더 건강한 정신을 가진 청년으로 변화하게 될까. 나는 「나루토」를 보며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많이 생각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나루토」는 기본적으로는 외톨이, 노골적으로는 왕따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작품을 두고 '왕따 이야기'라 단언하는 것은 너무 심각하게 단순화시킨 것일지도 모르나, 두 작품의 내용을 고려할 때 왕따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주위의 모든 것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모두의 영웅이 되는 열등생 나루토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왕따 탈출기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으며 신지에게도 꽤나 괜찮은 자극이 될 것 같지 않은가.
한편 「원피스」의 루피를 보며 신지를 떠올린 것은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왠지 루피라면 신지의 찌질함을 단번에 해결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루토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것은 신지에게 좋은 공부가 될 수는 있을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나루토의 강한 정신력을 보고 '나는 약해서 저렇게 할 수 없다'며 두 무릎을 끌어안기에도 딱 적절할 수도 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루피라면 신지가 어떤 종류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이며, 적당한 기회에 특유의 명대사를 빵 터뜨리며 신지의 두 눈을 감동의 눈물로 가득 채워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믿음이 간다.
그만큼 세 주인공들을 두고 이런저런 공상을 펼치다 보면 참 재미있는 생각들이 많이 떠오르는데, 그 중 하나는 과연 신지가 없었다면 루피와 나루토가 탄생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루피와 나루토를 보고 있자면 마치 '신지'를 통해 드러나 버린 언제나 우울하고 소극적이며 대인관계에 취약한 이 시대의 소년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그들이 나타났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풀죽은 얼굴로 관객과 첫 만남을 이루고 강제로 에반게리온에 탑승하는 신지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성격을 지닌 루피와 나루토는 무언가가 되고야 말겠다는 성장 선언을 통해 스스로의 손으로 이야기를 열어 펼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과연 나루토와 루피는 언제나 우울한 이카리 신지와 대비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신건강 이상 없음' 진단서를 받아낼 수 있는 것일까? 루피의 경우 조증이 의심될 정도로 평상시에 극단적으로 즐거우며, 동료 선원들에 대한 헌신과 강적에 대한 용기는 만화임을 고려한다 치더라도 놀라울 정도가 아닌가.
과연 흠잡을 데 없는 정신건강을 가진 소년일까? - 루피와 상디의 경우
때문에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몰두하던 와중 한 가지 의심을 갖게 되었다. 루피의 정신적 성장은 어느 순간 멈춰버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정신의 성장이 멈춰버린 순간은 바로 샹크스가 팔을 잃은 때가 아닐까? 자신을 구하기 위해 팔 하나를 잃었으면서도 '무사해서 다행' 이라며 미소 짓는 샹크스를 본 어린 루피는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을 텐데, 그것이 샹크스에 대한 존경심과 어우러져 이 사건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다는 강박관념을 낳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강박이 심하다 보니 샹크스가 루피를 구하는 순간 보여준 샹크스의 용감하고도 헌신적인 일면이 그대로 루피의 인격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인간이 오랜 시간동안 살아가며 차분히 형성해야 할 인격과 행동양식을 순식간에 마련해버린 것이랄까. 말하자면 일종의 트라우마인 셈인데, 덕분에 정신연령은 그 이후로 거의 성장하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루피는 동료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한편으로 선장이란 직책에 비해서는 어린이 같이 순진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하늘섬 편에서만 보아도 선원들의 위험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무턱대고 하늘섬에 가자고 우긴다던가, 출항을 앞두고 헤라클레스 사슴벌레를 잡느라 지각한다던가 하는 일들에서는 루피의 그런 면모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어쩌면 루피는 밀짚모자를 샹크스에게 돌려주기 전까지는 일종의 '어른스러운' 성장을 겪지 못할 것이며, 밀짚모자를 돌려준다 할지라도 과연 멈춰버린 성장이 재개될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른 멤버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 보자. 루피가 그렇다면 상디는 어떨까? 두 사람의 과거는 확실히 흡사한 점이 많다. 샹크스는 팔을 잃었고, 제프는 다리를 잃었으며, 그로 인해 두 소년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루피와 달리 상디가 겪은 어린 시절의 고난은 더욱 가망 없고 지독하고 장기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제프는 상디가 타고 있던 배를 습격한 해적선의 선장이었으므로 스스럼없이 함께 웃고 즐겼던 루피-샹크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긴장감이 맴도는 관계였다. 덧붙여 사건 이후 곧바로 헤어져 루피에게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샹크스와는 달리, 상디와 제프는 그 이후로도 선상 레스토랑에서 수년간 함께 생활했으며 그동안 겪은 일들이 상디의 인격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애초에 적이었던 제프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고, 해적선이나 다름없는 선상 레스토랑에서 온갖 손님들을 보며 성장했을 상디는 친구-동료 관념에 대해 보통 사람보다 관대하고 독특한 입장을 갖추고 있다. 클리크 해적단의 귀신 깅과의 사귐이나 Mr. 2 봉쿠레와의 우정을 고려해 보면 루피만큼 엉뚱하고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상당한 포용력을 갖추고 있으며 약간이라도 마음이 통할 것 같다 싶으면 상대방보다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친근하게 접근하는 타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상디의 실질적인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제프에 대한 건방진 행동들은 '한때 적이었기에 마음껏 감사 표현을 할 수 없는' 생활이 자연스레 지속되면서 생겨난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며, 아버지 없이 자란 루피-나미-조로-우솝 등과는 달리 자신이 이미 성장한 어른임을 표현해 인정받기 위한 목적으로 수염을 기르고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수염과 담배는 다름 아닌 제프에게 한 명의 남자로 인정받기 위한 소품인 셈이다.
반면 어머니와 또래 여자아이와의 관계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디의 어린 시절은 상디로 하여금 여성과의 일반적인 관계맺음을 불가능에 가깝게 만들어버렸다. 상디는 어차피 한 배에서 생활하며 매일 보고 있을 나미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휴가 나온 군인처럼 두 눈에 하트가 꽂혀버린다. 루피를 생각해 보면 「원피스」 전반에 걸쳐 루피의 어머니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루피에겐 적어도 술집 여주인 마키가 있었고, 어쨌든 동네에서 자랐기에 또래 여자아이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조로에게는 쿠이나가 있었고, 우솝에게는 카야가 있었다. 상디는 무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비롯해 여자-소꿉친구 하나 없이, 해상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땀내 나는 해적들 틈새에서 그들의 음담패설을 들으며 자라온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마치 남중-남고-공대-군대 테크트리를 찍은 것 이상의 부작용이 생겨버렸다. 모든 여성을 잠재적인 연애의 대상으로 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자신이 받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는 여신들, 즉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런 면이 상디의 매력 포인트라 할 수는 있겠으나 이 역시 '세상엔 친구와 적과 뉴하프와 누님들이 있을 뿐' 이라는 식의 흑백논리(?) 4분법(?)이 상디의 세계관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디도 어지간히 불쌍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 - 조로와 쵸파, 우솝의 경우
쵸파가 히루루크의 죽음을 딛고 하나의 인간으로, 사슴으로, 어린애에서 남자로 성장하는 인물이라면 조로는 이미 죽은 쿠이나를 등에 업고 다니는 인물이다. 쵸파가 히루루크의 유지를 이어받아 의술을 펼치는 방식으로 히루루크를 기억한다면, 조로는 칼을 휘두를 때마다 죽은 쿠이나를 회상하며 '대검호'가 되겠다는 암묵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괴물 쵸파가 히루루크를 만나면서 히루루크의 어린 아들로 거듭났다면, 조로는 쿠이나가 죽으면서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인물이다. 따라서 쵸파는 「원피스」에서 가장 마음이 여린 어린이이며, 조로는 「원피스」에서 가장 진지한 어른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핏 장난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루피의 '해적왕' 보다 조로의 '대검호'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유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조로는 '절대 죽을 수 없다'던가 하는 식으로 죽음과 관련된 대사를 많이 갖고 있는 편인데, 생각해보면 조로는 그 자신의 발언과는 반대로 꽤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물일 것만 같다. 좀 더 상세하게 표현하자면...... 조로는 쿠이나의 죽음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로 인해 대검호가 되지 못하고 (쿠이나처럼) 허무하게 죽는 일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문에 조로는 절대로 지지 않으려 하며, 만약 어쩔 수 없이 죽게 된다면 차라리 싸움터에서 죽기를 바란다. 계단에서 실족해 죽는 것과 같은 허무한 죽음은 조로가 가장 두려워하는 종류의 죽음이다. 리틀 가든에서의 '발목을 자르고 싸우면 승률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식의 발언은 그러한 조로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솝은 나름대로 씩씩하게 삶을 꾸려 나가는 소년가장 타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솝은 부모의 상실을 두고 거짓말을 해 스스로에게 환상을 제공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큰 슬픔을 겪은 소년이었으나, 부모 없이 홀로 성장하는 와중 심지가 꽤나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병든 소녀 카야를 격려해 주는 모습이라던가, 밀짚모자 해적단에서 가장 약한 전투력을 지녔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는 루피나 조로 못지않은 고집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우솝은 생각보다 상당히 성숙한 내면을 갖춘 소년이다. 물론 우솝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슬픔에 젖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바다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용감한 바다의 전사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사고방식을 밝게 이끌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적이 쳐들어 왔다'는 우솝의 거짓말이 마을 사람들을 놀래키기 위한 장난의 외형을 갖추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잃은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인 점을 떠올려 보면, 캡틴 크로를 물리친 이후 우솝 해적단을 해산하고 직접 (아버지를 찾아) 바다로 나가려 하는 우솝의 씩씩한 모습은 그야말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명작 「엄마찾아 삼만리」의 주인공 마르코가 떠오를 정도. 게다가 잠시나마 생사를 함께한 밀짚모자 해적단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각배로 떠나려 한 자립심을 보면 역시 우솝은 평범한 소년이 아니다. 우솝은 거인족 브로기와 도리를 보며 언젠간 반드시 엘바프를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하고, 툭하면 바다의 전사를 운운하는데, 그런 마음가짐 역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강인하게 홀로 설 수 있는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 되기 위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밀짚모자 해적단 중에서는 나미와 더불어 좀 비겁한 일면이 있기도 한데, 사실 정상적인 해적이라면 이정도 비겁한 면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우솝을 보고 있으면 이 녀석이 굉장히 약하면서도 굉장히 용감하기 때문에, 때로는 강력한 힘을 가진 루피나 조로보다도 더욱 용감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사람도 아닌 고잉 메리호를 두고 동료들과 다툰다던가, 저격왕 마스크를 쓰고 친구들을 도우러 나타난다던가 하는 모습은 누군가를 '외톨이'로 만들거나 스스로 외톨이가 되는 일을 매우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태도가 아닌가. 어쩌면 요즘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드럼 왕국에서 외톨이로 평생을 보낸 쵸파가 우솝과 잘 어울리는 것도 아마 우솝의 그런 성격에서 비롯된 것.
외톨이들이 마음을 여는 방식 - 나미와 쵸파, 니코 로빈의 경우
나미와 쵸파, 니코-로빈은 「원피스」에서 가장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나미는 어린 시절부터 한 마을의 운명을 짊어져야만 했고, 수도 없이 누군가를 배신해야 했다. 때문에 '해적이 가장 싫다'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아마도 그녀가 갖고 있는 해적에 대한 혐오는 해적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된 것임이 다분하다. 특히 '해적'이라는 무리를 증오하는 방식은 재미있는 이분법을 이룬다. '해적을 싫어하는 한, 나는 해적이 아니야' 와 같은 위로를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미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이러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아론 일당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아주 만약의 경우이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다행이지만.
그런데 나미를 보면 그런 면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건강한 여자아이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원피스」에 일종의 표현 장애가 있는 캐릭터들이 꽤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상디가 여자를 대하는 방식이라던가, 루피가 만나는 모든 이를 자신의 동년배라 생각하는 것이라던가(무조건 반말을 한다), 쵸파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들을 때 화를 내는 척 연기한다던가...... 하는 것들을 보면 과연 나미는 그런 것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 법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미는 나미의 마음을 옭죄고 있던 짐들을 루피가 전부 '아무 조건 없이' 날려버렸으며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봄으로써, 「원피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트라우마를 완전히 해소해버린 인물이다. 때문에 그녀는 이제 정말 루피 못지않게 속 편히 항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수전노 같은 면모를 제외한다면 밀짚모자 해적단에서 쵸파 이상으로 건강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라 단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래는 니코 로빈, 쵸파, 프랑키나 칠무해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죽 쓴 다음, 나루토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계획이었으나, 분량이 상당하여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한다. 무엇보다 원래 생각한 걸 끝까지 쓰게 되면 밤을 지새워도 부족할 것 같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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