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나이트」는 배트맨의 존재방식을 물고 늘어지는 영화다. 다시말해 배트맨을 정의하는 영화다. 누가 배트맨인가가 아니라 배트맨이 누구인지가 바로 「다크나이트」 전반을 휘어잡는 화두이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은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반쯤 완성된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점차 다양하고 복잡한 궁지에 몰리고 몰려 어떤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지를 조명한다. 고 히스 레저가 열연한 조커의 말마따나 "죽을 정도의 위기를 통해" 배트맨은 「비긴즈」의 배트맨에서 「다크 나이트」로 변이하여 완성되고야 마는 것이다.
「비긴즈」에서의 배트맨은 사회를 아우르는 법이라는 시스템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을 마천루 위에 올라 두루 살피는 존재자였다. 한 나라에서 1년 동안 새롭게 생겨나는 법이 몇개나 될까. 브루스 웨인의 입장에서... 사건 이후에 마치 식물이 자라듯 법정에서 느긋하게 탄생하는 법이라는 것들은, 정의를 실현시키기에는 짜증이 날 정도로 느리고 허술한 것이다. 「배트맨 비긴즈」에서의 브루스 웨인은 재판정에서 아버지를 죽인 범인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만약 그가 법의 완전함을 믿고 있었다면 총을 준비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법정은 배트맨이 탄생한 곳이 아니다. 「비긴즈」에서 배트맨의 탄생은 대단히 복잡한 요소들을 통해 설명된다. 이를 통해 배트맨 비긴즈는 팀 버튼의 배트맨과는 굉장한 차이점을 갖는 영화가 된다. 가령, 팀 버튼의 영화에서 관객들은 아버지를 잃는 한 소년을 만난다. 그리고 소년은 어른이 되어 배트맨이 된다. 배트맨은 간결하지만 무척 깔끔하게 완성되었고, 팀 버튼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팀 버튼 「배트맨」영화의 매력은 필연적으로 배트맨이라는 인물의 존재함에 의지하지 않는다. 팀 버튼은 차라리 고담 시라는 거대하고 기괴한 유령의 집을 만드는 데에 집중한다. 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배트맨이라는 인물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가 탄생한 계보학적 원인과 심리적 원인, 사회적 원인, 감정적 원인, 구조적 원인, 물리적 원인을 매우 다채로우면서도 풍부하게 제시한다. 마치 직소 퍼즐과 같이, 그를 통해 관객들은 배트맨이라는 히어로의 정체를 찾아간다.
그러나 「비긴즈」에서의 배트맨은 말하자면 아직 유년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비긴즈」를 단 한번 밖에 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유년기에 머물고 있는 배트맨에 대해 적절한 근거를 댈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내가 보았던 「비긴즈」에서의 배트맨은 왕따가 아닌 여러분의 다정한 이웃, 배트 서치라이트를 보며 게리올드만과 어깨동무를 하고 웃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이른바 '진정한 영웅'이었다. 나는 그런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배트맨이 누구인가. 그는 쫓기는 영웅이고, 어둠 속에 숨어 공포를 무기로 소리 없이 악을 소탕하는 외로운 영웅이다. 때문에 영화 속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비긴즈」에서의 배트맨은 2% 부족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은 계산된 부족함이었음이 밝혀졌다. 바로 「다크나이트」를 통해서.
「다크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배트맨을 그야말로 복잡한 상황에 몰아 넣는다. 그렇다. 다크 나이트는 복잡한 영화다. 서두에서 이 영화는 배트맨의 존재와 관련된 영화라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 영화에 걸려 있는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조커에 대항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배트맨은 더 이상 정의감만으로 이루어진 '착한 괴물'이 아니다. 조커는 범죄의 진리라 여겨졌던 돈조차도 우습게 불태워버리는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악당의 모델을 제시하며 낄낄댄다. 그 와중에 질서와 규율에 얽매임으로써 간신히 지탱해나가는 정의로운 사회와, 파괴와 살인을 통해 모두가 평등해진다는 조커의 궤변이 맞부딪힌다. 배트맨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신념을 위해 조커를 죽이지 않을 때, 조커는 배트맨이 없는 고담시는 재미가 없을 것이라며 배트맨을 죽일 생각이 없다고 한다. 동시에 브루스 웨인과 레이첼과 하비 덴트의 삼각관계가 형성되지만, 사실 더욱 심각하고 더욱 진정한 삼각관계는 배트맨과 조커와 하비 덴트의 관계다. 정의로운 백기사 하비 덴트를 보며 레이첼과 오순도순 살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배트맨은 순전히 자신을 향해 있는 조커의 광기어린 범죄들과, 레이첼의 비극적 죽음, 그로 인해 악인으로 변모한 하비 덴트를 통해... 「비긴즈」에서의 밝은 면을 모두 떨쳐버리고 다크나이트로 변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크나이트」는 슬프고 무서운 영화다. 안데르센의 동화보다 심각하게 주인공 배트맨을 비극과 위험 속으로 몰아붙인다. 아버지도 죽고, 애인도 죽고, 자신을 대체할 정의의 인물도 죽어버린데다가 그 모든 것이 무언가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따라서 그는 한없이 스스로를 증오하고 학대할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영웅이다. 모든 죄업을 자신의 어깨에 매고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러한 종류의 숨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불행을 통해, 그 자체로 배트맨이 다크나이트로 변화하는 광경이다. 관객들은 그 광경을 목도하며 다음과 같은 게리 올드만의 대사를 듣는다. "그는 다크 나이트니까" 그의 불행의 전모를 알고 있는 이는 배트맨 자신과 관객들 뿐. 그래 이건 또다른 위대한 비극의 탄생이다. 브라보.
사족.
히스 레저의 조커는 완벽한 사악함과 광기로 무장한 악당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었다. 「다크나이트」는 다소 호러영화의 구색을 갖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유의 대부분은 아마도 조커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히스 레저의 조커는 굉장한 수준의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 두려움의 근본은 물론 히스 레저의 신들린 듯한 연기에서도 비롯된다 할 수 있겠으나, 조커라는 악당이 내세우고 있는 가치가 어떠한 규칙도 없다는 점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궤변들로 무장한 히스 레저의 조커는 지구 어딘가 잘 찾아보면 한명 쯤, 혹은 미래의 언젠가 있을 법 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욱 공포스럽다. 생각해보라. 배트맨과 조커, 둘 중 어느 인물이 현실에 등장할 가능성이 더 높은가. 배트맨은 영웅이지만, 조커는 미치광이 악당이다. 우리 주위에는 영웅이 많을까, 아니면 악당이 더 많을까. 그것도 아니면 미치광이가 더 많을까. 조커라는 악당의 존재는 사회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본성을 의심하게끔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과연 우리의 사회는 도덕적인 다수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조커가 무서운 이유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사회의 견고함이 부실하다는 것을 지적하다는 데에서 온다. 사회는 믿지 못할 무엇이다. 사회는 견고하지 못하다. 차라리 사회를 붕괴시켜라. 초커는 확실히 미쳤긴 하지만, 그가 미친 이유는 우리가 사회의 틀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조커는 감히 아나키스트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인간들의 근본적인 삶의 태도를 무시하고 박살내는 인물이 아닌가. 그 앞에서 고담시가, 배트맨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이글루스 가든 - 내맘대로 영화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