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찬 그년」
일단 웃는다. 동생, 찬, 그년이라니. 웃기지 않은가. 무슨 누나가 동생 연애까지 신경 쓸 정도로 오지랖이 넓어. 아무튼 곧이어 ㄴ 자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동생 찬 그년」은 「동생 찬 그녀」가 된다. ㄴ 에 담겨 있던 분노가 소멸된 타이틀은 영화의 결말을 암시한다. 단 한 순간도 조우한 적 없었던 두 여인이, 동생을 토대로 막연하게 만나게 되었다가, 기묘하게 화해한다. 그러나 그 화해는 두 여인이 어깨동무를 하고 하하호호 웃고 끝나는 고전적 막장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끝나기 직전 두 사람은 함께 족발을 먹으며 화해하되, 그 사이에는 전화 부스의 유리문이 답답하게 놓여 있다. 동생 찬 그녀는 누나에게 나무젓가락으로 족발을 집어 건네주지만, 전화 부스에 갇혀버린 누나를 구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화해했으나 동생과의 관계와 선언에 대한 의무감과 자존심이 남아 있기에 함부로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제목을 보면 그러한 의무감에서 비롯된 앙금이 '동생 찬' 이라는 말에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생과 헤어진 그녀가 아니라 동생을 찬 그녀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그년은 은근슬쩍 그녀로 승격되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동생을 차버렸고, 누나는 누나로서 동생 찬 그녀를 응징해야 한다. 그러나 누나가 그녀를 두고 분노를 표현하는 명분은 혈연으로 맺어진 남매가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는 가족의 논리로 포장되어 있으나, 그 근본은 결국 집단의 논리이며 원인과 결과의 파악이나 그를 위한 잘잘못의 구분과 같은 최소한의 정의를 요구하지 않는 종류의 억지에 가깝다. 관객은 이러한 누나의 내면을 영화 전반부를 통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데, 모든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관객이 알고 있는 누나는 실연당한 동생을 위해 복수하려는 인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순전히 머피의 법칙들 중에서도 극악한 범주에 포함될 만한 다채로운 악재들로 점철된 하루, 끝내는 전화부스에 갇혀버린 자신의 꼬이고 꼬인 하루를 그녀를 통해 분풀이할 생각 뿐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말 그대로 누나는 개인의 이기적 추측과 판단의 추상적 공간 속에 갇혀버린 인물이며, 그런 누나의 캐릭터는 누나가 전화 부스에 갇힘으로써 관객들 앞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동생과 헤어진 그녀는 동생과 나와의 오래된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 미묘한 가족 의식에 의해 어느새 동생 찬 그년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한편, 동생 찬 그녀는 자신의 빨간 소형차를 타고 누나가 갇힌 전화 부스 앞으로 다가오는 인물인데, 그녀는 전화 부스에서 목이 졸리고 손가락이 끼여버린 누나에 비해 훨씬 자유로우며 여유가 있다. 자신의 편견과 대상을 잃은 일그러진 복수심에 갇힌 누나가 그녀의 눈에 우습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우스워 보여요?"
"네 지금 쫌 우스워요."
나아가 그녀는 누나가 숨은 쉬어야 하지 않겠냐고 비꼬며 전화 부스 문을 살짝 열어 주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화해는 일상적인 잘못의 인정과 고백, 앞날의 약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종류의 화해가 아니라 일종의 비극적 인간됨에 대한 스스로의 구원으로 변화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스스로 증오를 품고 멋대로 복수하는 가련한 존재자들이 아닌가. 그러한 증오의 대상이 직접 차를 몰고 와 비록 그것이 비꼼이라 할 지라도 숨 쉬라고 문 열어주며, 족발을 집어 주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이 서로를 용서하고 끌어안아 삶을 지탱해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둘의 마음 속에서 서로에 대한 용서와 이해는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어쩌면 두 사람은 외부에서의 자극을 통해 간신히 열려진 전화 부스의 틈과 같이, 서로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간신히 내놓을 수 있었던 미소라는 틈을 통해 족발을 나누어 먹으며 누구보다도 더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동생 찬 그녀 보러 가기 ↓ 네이버 독립영화상영관. 위에서 세번째 줄 오른쪽에 있다. 23분짜리 영화다.
http://movie.naver.com/movie/special/0606/indi/index.nhn?inpage=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