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무언가를 표현할 때, 인간의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 인간의 내면을 이루고 있는 의식에서 출발하여 그 의식이 외연적으로 구체화되는 선에서 완성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이라 부르기도 하고 전달이라 부르기도 하며 때로는 호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표현과 전달과 호소의 공통점을 꼽아보자면 그것은 역시 '드러냄'이다. 같은 악보의 똑같은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은 슬프게 들리고, 어떤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은 경쾌하게 느껴진다. 같은 음악에서 전혀 상반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음의 높낮이와 박자의 미묘한 변주를 무의식적으로/의식적으로 음표와 악보가 분절한 음의 영역에서 어긋나지 않는 수준에서 미묘하게 변주하였기 때문이거나 그러한 표현을 수용하는 자의 감정 내지 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드러냄'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외연적 형식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자의 미묘한 떨림과 의지 내지는 그의 컨디션/수용하는 자의 컨디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표현은 영원불멸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이 악보를 남겼다 해도 우리는 그의 악보를 재해석하여 그를 흉내낼 수 있을 뿐이지, 그의 머리 속을 지배했던 그만의 음악을 우리는 들을 방법이 없는 셈이다.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인간이고, 그 표현을 의식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이라면, 인간의 표현과 수용에 있어 영원불멸의 진리는 없다. 참된 것도, 거짓된 것도 없다. 말하자면, 예술이 참되고 영원불멸한 원리를 찾는 창작 활동이라면, 어쩌면 그것은 마냥 공허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소설에 대한 소설, 시에 대한 시, 음악에 대한 음악, 그림에 대한 그림... 즉 예술에 대한 예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메타 예술의 표현과 주제의식은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느니만큼 더욱 탐구적이고, 더욱 이해하기 어려우며, 더욱 대중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없었다면 적어도 예술의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붕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탄생한 초기에는 생존의 기본 조건만을 찾아 헤메이다, 적당한 삶의 수준을 확보하면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의 삶의 형태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소개할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인간의 조건 시리즈'라고 멋대로 지어 부르는 시리즈이다. '인간의 조건'은 마그리트 그림의 주제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이기도 하니 이번 기회에 이 멋진 그림들을 소개하게 된 것에 대해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

인간의 조건1 1933
인간의 표현은 과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하는 의지에 의한 것인가? 그러나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인 조건들(대표적으로 눈의 구조나 뇌의 구조)을 바탕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세계 인식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고, 우리의 표현은 세계 그 자체의 재현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우리의 표현은 우리의 인식이라는 이름의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우리의 표현은 우리의 인식 내부에 갇혀 있다. 그림 속의 그림이 자연을 대단히 실감나게 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집 내부에, 캔버스 속에 갇혀 있는 것은, 기법이나 그림을 이루고 있는 물질들(예를 들어 물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인 것이다.
인간의 조건 1935
회화는, 그림은... 아니 예술로서의 인간의 표현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그것은 과연 우리가 보는 세계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가 우리의 시각으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의 숨겨진 모습 또는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당연한 모습을 인지하는 것에 있는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예술 작품의 감상을 통해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세계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공간적인 것이건, 심리적인 것이건, 좀 더 깊은 수준의 의식의 차원에 관한 것이건 간에.
아름다운 포로 1947
인간은 세계의 일부로서 세계를 표현하려 하지만, 그것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액자는 바로 그러한 한계를 상징한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세계 전체를 단번에 상상하거나 사유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에는 좀 더 명백한 이유가 있는데, 인간은 감지하는 모든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려는 세계의 일부를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그림을 보면 그림 속의 그림에는 바다가 나와 있지만, 그림 옆의 돌멩이(?)는 그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우리는 바다를 그리기에 바빠서 옆에 놓여 있는 바위나 하늘 위에 있는 구름을 표현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인간은 짧은 시간, 좁은 공간을 산다는 한계가 있지만, 인간의 집중력과 중심을 찾고자 하는 의지 덕분에 세계 전체를 머리 속에 담을 수 없게 된다. 불타는 관악기는.... 뭔 뜻인지 모르겠다ㅡㅡ;;; 다 같이 생각해 보자.
폭포 1961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계의 전체적 외연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세계의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생각할 수 없을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의 전체적 외연은 세계의 일부인 우리의 머리 속에 존재하기에, 또다시 세계의 일부로 환원된다.
지는 저녁 1964
유리창은 우리와 세계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투명한 물질의 성질로 인해 우리와 세계를 시각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연결해주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림 속의 유리창을 보면, 이미 깨져버렸기 때문에 세계와 인간을 연결해주는 메신저/벽으로서의 기능을 더이상 수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붉은 태양과 하늘을 그 외연에 보존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사고와 지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에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 집착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비꼼인 것일까? 아니면, 세계와 인간이 결국 소통하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될 때에도 예술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예언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진짜 태양이 아닌 가짜 태양을 표현하고 있는 예술 자체가 사라지거나 바뀌거나, 아니면 깨져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마그리트의 예술적 통찰인 것일까?
이 포스트는 나의 예전 블로그 Let the patient sing! 에 2007년 6월 16일 포스팅한 것을 가져온 것이다. 확실히 예전에 쓴 글이라 지금 보기엔 좀 만족스럽지 못한 면이 있다. 요즘 다시 쓴다면 더 재미있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튼 이제 블로그 이사도 거의 다 끝나가는 듯 싶다.
이글루스 가든 - 그림을 읽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