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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9월 03일
빨간구두.
 

 

   오늘 수업을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영화는 어떨까. 야동같은 공포/스릴러 영화. 배경은 어디로 하지. 학교가 어떨까. 최고로 변태적인 상상력이 불거질 수 있는, 성적 욕망이 억눌린 아이들의 수용소. 강간 혹은 정사 장면으로 시작하면 충격적이겠군. 장소는 옥상 혹은 화장실. 아니 화장실이 낫겠다. 그쪽이 더 스릴 있어. 선생과 학생의 섹스는 어떨까.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즐기는 관계여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평범한 야동이 되어 버린다. 나는 이 영화를 좀 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 좋아. 이 섹스에는 가학과 폭력이 섞인 종류의 것으로 하자. 폭력은 선생이 학생에게? 아니면 학생이 선생에게? 일단은 여선생이 남학생에게 당하는 것이라 하자. 나로서는 이 편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편할 것 같다. 문화를 의미하는 교실에서의 권력이 본능에 닿아 있는 지점인 화장실에서 역전되는 광경이 흥미로울 것 같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교권추락에 관한 메타포로도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선생 강간은 그야말로 최악의 교권추락이 아닌가. 장면은 어떻게 연출하지. 그들의 정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는 싫다. 차라리 화장실 칸막이 밖에서 닫혀진 문을 카메라로 찍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찍고 싶다. 카메라를 적절히 흔들어 그들의 정사가 격렬함을 표현한다. 칸막이 너머로 들려오는 헉헉대는 숨소리, 곧이어 누군가가 변기에서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여선생이 변기에서 떨어진 것이다. 이 소리를 효과적으로 넣으면 굉장히 리얼한 장면이 될 수 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사는 계속된다. 여선생의 신음은 통증에서 비롯된다. 순간 화장실 칸막이 아래로 흰 손이 툭 튀어 나온다. 관객을 놀래키기 위해 여선생의 손을 클로즈업할 필요는 없다. 이 광경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럽다. 화면 가득히 손을 채우는 것보다는 칸막이 전체를 카메라로 담담히 비추며 작은 손이 노출되도록 하게 찍고 싶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려버린 모습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물론 손이 튀어나온 이후에도 칸막이 속 정사는 계속된다. 관객들에게 정사로 인한 에로틱함보다는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한다. 곧이어 손이 움직이지 않고 마치 마비된 것 처럼 연기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정사의 진동이 손에 와닿는 모습을 보여 분노를 가중시킨다.

   왜냐하면 이 분노와 슬픔은 곧이어 이어질 여선생이 남학생을 살인하는 장면에 대한 동조로 이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선생이 남학생을 살해하는 것으로 하자. 그런데 어떻게 살해하지? 일단 떠오르는대로 정하자. 여선생은 화학 선생이다. 그녀는 몇년 전 교육용으로 지급받은 청산칼리가 과학실에 있음을 알고 있다. 여선생은 청산칼리 용액을 남학생에게 주사한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여선생의 살해동기다. 한 번의 강간으로는 여선생의 살해 동기가 충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 정사가 협박을 통해 주기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자. 무엇이 되었든, 여선생의 꼬투리를 잡아버린 남학생의 협박이다. 사진, 혹은 동영상. 얼마든지 마련 가능하다. 하지만 이 동기를 관객에게 곧바로 발설해서는 안된다. 이를 발설하는 방법은 많다. 예를 들어 노련한 수사관이 하나하나 밝혀가는 것을 통해 영화 후반에 발설하는 방법이 있고, 여주인공의 회상이나, 독백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자, 그렇다면 영화의 시작을 생각해보자. 

   영화는 과학실에서 여선생이 청산칼리 용액을 만들면서 시작된다. 과학실에는 학생들이 있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아무도 없는 것이 좋을까? 이건 정말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다. 학생들이 없다면 이건 그냥 범죄가 되지만, 학생들이 있다면 학생과 선생간의 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고발하는 영화로도 읽힐 수 있다. 학생들이 실험하거나 잠자고 있는 동안에 자신을 괴롭히는 남학생을 살해하기 위해 약을 만들고 있는 여선생이라니! 음. 개인적으로는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과학실을 빠져나가자 약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과학실에는 아무도 없어야 한다. 다만, 과학실 창문으로 학생들이 운동장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보여주면 된다! 이러면 학생과 선생을 동시에 보여주면서도, 선생을 과학실에 혼자 있게 둘 수 있다. 선생은 조용히 약을 주사기에 넣는다. 주사기 클로즈업. 주사기를 보며 선생은 회상에 빠진다. 그 회상장면이 바로 위에서 말한 학생과의 화장실 정사다. 학생의 모습은 보여줘선 안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가 누구에게 강간당한 것인지를 모르게 하자. 다만, 그녀가 복수를 위해 청산칼리 용액을 만들었다는 사실만 알려주면 된다. 회상이 끝나면 그녀가 퇴근을 위해 승용차에 타도록 하자. 그녀가 자리에 앉는 순간, 누군가가 조수석 문을 벌컥 열며 옆자리에 앉는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다. 평범하게 생겨야 하며, 모범생으로 보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진짜 나쁜 놈들은 머리 좋은 놈들 중에 있는 법이다. 안경을 씌우는 것은 어떨까?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은 "선생님 태워주세요" 와 비슷한 느낌의 대사를 몇 마디 한다. 여선생은 곤란하다는 듯한 연기를 하며 적절히 거부하는 대사를 한다. 순간 남학생의 태도가 싹 바뀌며 반말로 그녀에게 모욕을 준다. 그녀는 당황해하며 차를 몰고 어딘가로 간다. 남학생은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창 밖을 본다. 이때 사이드미러에 비친 여선생의 '씨익'하는 무서운 미소를 보여준다. 연기 속의 연기. 곧 살해할 대상을 옆에 두고 궁지에 몰린 척을 하는 여선생의 모습을 3초 정도 보여주면 충분하다. 자동차가 으슥한 산 기슭에 멈추고, 남학생은 여선생을 덮친다. 치마를 끌어올리고 가슴을 더듬는다. 여선생은 순종적으로 남학생에게 키스한다. 키스. 이 장면은 카메라를 뒷좌석에 배치하여 여선생의 사이드브레이크에 엊혀진 오른손과 목덜미가 동시에 보이도록 해야 한다. 남학생은 이미 여선생의 허리 위에 올라타 있다. 키스 때문에 남학생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여선생은 운선석 시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주사기를 몰래 꺼낸다. 그리고, 빠르고 잔인하게 남학생에게 청산칼리 용액을 주사한다. 당황하는 남학생. "뭐야? 이 주사기 뭐야?" 여선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남학생을 밀쳐낸다. 차문을 열고 밀쳐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남학생은 욕을 한다. 썅년이라느니 이년이라느니 하는 욕설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남학생은 순식간에 숨이 끊어진다. 좀 더 리얼한 장면을 위해, 마지막 대사고 뭐고 없이, 그저 욕이 끝난 직후 죽어버리도록 연기한다.


   이 이후로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단편영화라면 여기서 끝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생각해 놓은 제목은 빨간구두다. 분홍신이라는 제목이 더 끌리는데, 1948년 영화 「분홍신」이랑, 김혜수의 「분홍신」 이 생각나서 그냥 빨간구두가 어떨까 한다. 말 그대로 동화 빨간구두의 그 빨간구두다. 신을 신었더니 춤을 멈출 수가 없었더라 하는 이야기. 제목을 보고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연쇄살인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 마치 남학생이 한 번의 여선생 강간 후, 계속해서 관계를 요구해온 것과 같이, 여선생은 이 남학생을 살인하고 꾸준히 살인하는 연쇄살인범이 된다. 그 이후로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만 이 여선생을 경찰이 잡게끔 만들고 싶지는 않다.


영화를만들자, 영화, 아이디어
# by 환자 | 2008/09/03 21:08 | ㄴ영화 망상 | 트랙백 | 덧글(28)
2008년 09월 03일
지금... 어디
 

 

  갓난아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 부부가 된 성원과 인애. 성원은 경찰이 되고, 인애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영화는 신고를 받고 불륜 현장에 도착한 성원이, 자신의 집에서 아내 인애를 검거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성원은 분노하지 않는다. 조용한 그를 앞에 두고 관객은 의아해한다. 그러나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게 되어 의아함은 소멸된다. 편집의 마법. 장면이 바뀌는 사이 성원이 인애에게 열을 냈거나 해명을 요구했거나 했겠지라고, 관객은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스포일링이 되는데... 그다지 치명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성원은 인애에게 화를 내거나 추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라진 장면에서, 아마도 성원은 조용히 아내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으리라. 이후 이 영화는 이 사라진 부분을 메꾸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원과 인애의 캐릭터를 하나의 완성된 인물로서 만들어낸다. 관객은, 영화가 진행되며 완성되어가는 두 사람의 캐릭터를 바라보며 앞부분의 사라진 장면을 추리한다. 멜로의 탈을 썼되, 보기 나름으로 추리물. 이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점이다.


   바뀐 장면은 구치소에서 걸어나오는 인애에게 성원이 두부를 내미는 장면이다. 인애는 보기 싫다는 듯이 두부를 밀어낸다. 보기만해도 그녀는 남편에게 화가 나 있는 것 같다. 관객은 다시 궁금해한다. 왜? 상식적으로는 지금의 상황에서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성원이며, 인애는 스스로의 잘못에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들지 못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쩔쩔매는 것은 성원이다.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좀 더 궁금증이 생긴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아 해소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 앞에 쫓고 쫓기는 할머니와 청년이 나타난다. 발목을 삐어 짜증내는 아내를 두고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성원은 달려간다. 장면 그대로, 성원은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다. 경찰로서의 본분과 남편으로서의 본분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결여된 사람이다. 그의 본분에 대한 충실함의 과잉은 그가 쫓던 청년이 할머니의 아들임이 밝혀지면서 드러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성원 역시도 자신의 역할 충실이 과잉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자신의 아들을 잡아 팔을 꺾느냐는 노파의 성냄 앞에 청년을 풀어주자 청년이 말하지 않았던가. "짭새도 아닌게..." 성원은 순간 경찰 배지를 보여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지만. 꺼내지는 않는다. 그 역시 자신이 오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다.


   한편 성원이 청년을 추격하는 동안 인애는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헤메게 된다. 성원은 그런 인애를 찾으러 다닌다. 두 사람이 골목을 헤메는 장면은 인애의 불륜이 어떠한 계기로 시작되었는지를 상징한다. 아내를 돌아보지 않고 일에 몰두하여 바깥으로만 도는 남편, 혼란에 빠지는 두 사람. 결혼이란 이런 거였던가.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인애의 불륜에 감정적으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사실 상식적으로는 성원이 잘못한 것은 없다. 그는 근무중이 아님에도 누군가를 추격할 정도로 성실한 경찰이며, 바람핀 아내에게 잠자코 아내가 좋아하는(그러나 자신은 싫어했던) 고등어를 부쳐 줄 정도로 속 깊은 남편이다. 게다가, 아내의 석방을 위해 좋은 집을 팔고 달동네로 이사왔다는 사실을 아내 앞에서 말하지 않을 정도로 사려 깊다.


   인애는 고민한다. 남편을 떠나고 싶지만, 도무지 미안해서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짜증스럽다. 남편이 집을 팔아 자신을 꺼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남편의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구토가 나오기도 했다. 차라리 자신에게 화라도 벌컥 내서 같이 화내고 싸우다가 집을 나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속 깊은 남편은 뼈만 남은 고등어 접시를 비우고 또다른 고등어를 접시에 내올 정도로 그녀를 챙겨준다. 화장대 유리 아래 깔린 사진을 떼어내려고 보니 이건 무슨 본드로 붙인 것인지 떨어지지도 않는다. 낑낑대며 노력해보지만 남편이 붙여 놓은 두 사람의 어린 시절 사진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바닥에 누워 있으니 조심조심 다가와서 이불을 덮어준다. 남편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보이지만, 인애에게는 부담스럽다. 불륜의 상대와의 전화통화를 옆에서 듣고도 화내지 않는 남편, 그 불륜이 자신 때문이라 여긴 탓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편이 바보같다. 미안함과 착잡함이 섞인 표정으로, 내일 집에서 나가겠다고 말하는 인애. 다음날 떠나는 인애에게 남편은 필요하지 않느냐며 통장을 건네준다. 잠자코 통장을 받아들이는 인애. 불륜 상대와의 약속장소로 가방을 챙겨들고 떠나는 인애지만, 걷고 걷다가 계단에 주저앉아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영화는 여기에서 끝난다. 인애는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에게 돌아갈 것인지, 다른 남자에게 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짓눌려 주저앉은 것이 아닐까. 이 영화의 감독은 누군가에게서 너무나 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일인지를 생각하며 성경의 에피소드를 끌어왔다고 했는데. 감독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영화로도 확장될 수 있다. 신은 우리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지나쳐 우리 인간은 짓눌려 죽어간다. 우리는 신을 떠나기 위해 애쓰지만, 신의 사랑이 아쉽고 또 미안해 신을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여기에서 신을 떠나는 자들은 나처럼 무신론자가 되는 것일 테고, 신에게 돌아가는 사람은 유신론자가 되는 것일지도.



사족.


1. 인애 역을 한 배우가 굉장히 예쁘다. 상당한 미인이다.


2. 요즘 단편영화를 모아 놓은 DVD를 구입해서 틈날 때마다 하나씩 보고 있는데, 좋은 영화가 굉장히 많다. 어떤 영화는 아무리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가 하면, 어떤 영화는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고 몇 번이고 돌려보게 만들기도 한다. 「지금...어디」역시 15분짜리 단편영화다.

이제 2시간짜리 영화들은 지겹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차라리 짧은 시간 동안 번득이는 재치와 작품성을 보여주는 단편 영화들이 무진장 끌린다. 앞으로는 단편 영화 리뷰들도 많이 올려볼까.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8783
   

간단한 소개는 이쪽으로.







이글루스 가든 - 내맘대로 영화해석
지금...어디, 단편영화
# by 환자 | 2008/09/03 01:55 | 영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18)
2008년 09월 02일
식당개 삼년이면 라면을 끓인다
 

   개 라면 끓이는 소리 하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도 하지만. 어린 시절 어느 만화책에서 이 문구를 본 이후, 이 문구는 내 비밀스런 신조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고등한 사고력과 문자해독능력, 시간관념이 요구되는 라면 끓이기라는 과제는 인간외의 존재자들에게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라면 하나에는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문명의 진정한 결정체들 중 하나다. 생각해보자. 음식과 우리 몸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가 없이 인스턴트 라면을 제작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 진공에 대한 물리적 지식과 탄소화합물로 이루어지는 비닐포장에 대한 화학적 지식 없이 라면 봉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상당한 수준의 도로정비와 도시구축이 있지 않고서야 저러한 대규모의 유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만약 우리의 문명이 멸망하고, 후대에 완전히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여 우리의 문명을 고고학적으로 조사하게 되었다 하자. 몇 년에 걸쳐 발굴에 발굴을 거듭한 그들의 눈 앞에 미이라가 된 라면 한 박스가 나타난다. 최첨단의 과학으로 라면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그들. 봉지 뒤에 적힌 조리법으로 우리의 언어를 알게 되고... 인스턴트 면을 통해 우리가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을 주식으로 삼았음을 알아내고, 밀봉을 통해 우리 문명의 위생관념을 간파한다.

   이, 이들은 밀봉하면 세균이 침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무려 이만년 전, 2008년의 미개한 호모 사피엔스들이!

   라면이란 이토록 고등한 지식축적을 토대로 이루어진 문화적 바탕으로 말미암아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라면을 개가 끓인다니. 개가 웃을 노릇. 이 말은 사실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을 살짝 변형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의 본래적 의미를 찾아내어 복원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될 것이다. Impossible is nothing. 시간만 넉넉하면 불가능은 없다! 삼년이면 개도 시를 짓고 라면을 끓일 수 있다! 하물며 개보다 고등한 인간이 무얼 못하겠는가. 아아 감동스럽지 않은가.

   그래, 열심히 살아보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개가 되든 해 보는 거다. 개가 라면을 끓이는 근성을 본받는다면, 나도 할 수 있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고등학생이라면 개를 떠올리며 공부도 잘 할 수 있어. 개처럼 하면 되는 거 아냐. 대학생이라면 개를 떠올리며 취직할 수 있어. 고시생이라면 개를 떠올리며 합격할 수 있어. 시밤 모두가 개보다 소중하고 푸들보다 사랑스러운 인간들이잖아. 노력과 근성이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사족.

   다만 시간과 타이밍이 중요한 연애는 절대적으로 제외. 
   스토커에 불타오르는 로망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제를.



횡설수설, 포기하면편해, 연애할기력으로공부를, 연애할기력으로꿈을위해노력을, 솔로천국
# by 환자 | 2008/09/02 20:37 | 나중일기 | 트랙백 | 덧글(21)
2008년 09월 02일
폭력의 역사. 근래 본 가장 명석하고 냉철한 영화.

 

   폭력의 역사.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제목 때문이다. 폭력의 역사라는 묵직한 제목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보는 와중에 장면 장면을 쉴 새 없이 곱씹어보게 만든다. 도대체 왜 제목이 「폭력의 역사」인거지? 감독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폭력의 기원? 이 영화는 인류 폭력의 역사를 축소한 하나의 메타포인걸까? 관객은 영화를 보며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머리 속에는 계속해서 폭력이라는 단어가 맴돈다. 폭력. 폭력. 폭력.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나름의 결론을 얻는다. 폭력의 개념은 각자의 삶과 지식 속에서 각자 짝을 찾아내게 된다. 고개를 끄덕인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잠들기 전,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며칠 후, 관객은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블로그에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양처럼 순한 소시민 톰 스톨이 영화 초반에 돌변하여 공격성을 보이는 장면은 사실 충격적인 장면은 아니다. 일단 수많은 영화들을 보며 익숙해진 우리의 시각 때문이기도 하고, 이성적으로는 그의 공격성이 정당방어의 측면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 스톨이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총을 쏘게 되는 카페 시퀀스는 일종의 폭력에 대한 정의내림이자, 폭력이 소속되는 사회가 용인하는 접점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폭력은 사회가 용인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분류된다. 이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에는 두 갱스터가 두 남녀와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굉장히 무법자스러운 살해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두 갱스터가 주인공 톰 스톨에게 (정당방어로) 살해되는 장면을 통해 극악한 폭력이 사회 내부에서 계약에 의해 통제되는 방식으로 변화하여 살아남게 된 폭력의 사회-기생성을 고발하고 있다. 소시민 톰 스톨은 갱을 살해하고 마을을 구한 영웅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는 폭력을 배제하는 겉모습을 띄고 있지만 사실상으로는 용인된 폭력을 통해 사회를 유지하는 사회의 저열함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이 아무리 사회 유지의 한 방편으로 마련되어 용인되는 것이라 할 지라도,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평화 혹은 외부적 폭력으로부터의 울타리로서 구축된 사회라는 건축물 내부에 잠재된 폭력을 비치하고 있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대단히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다. 톰 스톨을 대하는 가족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사회에 기생하는 폭력이 진딧물 같은 기생이 아니라 악어새라는 공생의 이름으로 버젓이 용인되는 공인된 폭력에 대한 불신과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가령 사회 구성원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합법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이, 그 몽둥이를 거꾸로 잡으면 어떻게 될까? 그들의 폭력이 어떠한 정치세력의 잘못된 판단과 올바르지 못한 이념에 의해 움직이게 되면 어떠한 결과가 일어나게 될까? 빠리 꼬뮌이 가장 먼저 해산한 것은 군대와 경찰이었다. 경찰은 합법의 가면을 쓰고 작동하는 권력자들의 로봇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걱정. 두려움.

   그러나 그러한 의심과 걱정과 두려움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법화된 폭력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학습된다. 주인공 톰 스톨의 아들, 잭 스톨의 변화가 이를 암시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며 싸움을 피할 정도의 평화주의자였으나, 아버지의 폭력을 행동의 근거로 삼아 자신을 괴롭히던 못된 학생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히게 된다. 그러나 잭을 옹호해 줄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 톰 스톨은 우리는 절대로 폭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집안이 아니라며 잭을 꾸중한다. 그러나 그는 폭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두 갱스터를 살해한 자신의 폭력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즉 톰 스톨의 말은 모순됐다. 그리고 그 모순된 톰 스톨의 내면을 통해 엿보이는 톰 스톨의 폭력과 그 행사에 대한 관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폭력은 매우 정교하고 시기적절하게 행사되지 않으면 사회를 통해 처벌받는 것이라는 통찰. 반대로 말해 정교하게 계획되고 시기를 잘 만나면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다는 교활함. 이것이 바로 소시민의 얼굴, 용인된 폭력행사의 권리를 가진 폭력의 화신 톰 스톨의 이면이다.

   한편, 사회를 통해 사회의 이익을 위해 정교하게 사육되는 폭력이라는 이름의 맹수는, 사회 속에서 나름의 생존법을 찾아 더욱 악랄한 모습을 드러내게는데... 그것은 바로 실질적인 몸의 구타나 살해 없이도 이루어지는 폭력이다. 증거도 자국도 남지 않는 무형의 폭력은 영화 속에서 주기적으로 톰 스톨의 커피숍을 순회하는 갱스터 포가티에 의해 구체화되고 톰 스톨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특히 스톨 집안의 막내딸 세라의 뒷모습을 포가티가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딸 가진 엄마라면 누구라도 공포에 질릴 수 있는 장면으로 무형의 폭력이 사회를 통해 쉽게 거부될 수 없는 폭력의 존재방식임을 암시한다. 무형의 폭력은 육체적 폭력에 비해 더욱 악랄하고 잔인한, 폭력 자체보다 더욱 그 본질에 가까운 폭력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제약을 받는 물리적 폭력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우리 사회를 휘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톰 스톨의 내면으로 파고든 폭력은 그의 아내 이디에 대한 태도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이라는 사회 구획에서는 인정받는 폭력을 휘두른 톰 스톨이지만, 가정이라는 사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속임과 배신의 폭력을 잠재하는 톰 스톨의 존재방식은 폭력의 과거를 청산하지 않은 채로 가정으로의 복귀를 위해 이중인격이라는 거짓말까지도(나는 톰의 이중인격 발언이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서슴치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비극적인 것은 톰 스톨의 내면으로 파고든 폭력이 아내 이디를 강간하는 데에서 이디의 육체로 침투하게 된다는 점이다. 톰과 이디의 계단 섹스 시퀀스는 톰의 폭력성이 이디에게 전도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상징적인 장면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대화가 오가는 평화로운 부부의 섹스가, 영화 후반 구타와 강압으로 변질되는 순간 이디가 교성을 내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가 용인하는 폭력의 기생-공생이 여성의 자궁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근본, 혹은 내면 깊은 곳까지 침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생성이 이루어지는 곳 자궁. 사회의 생성이 사랑과 화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폭력의 간음-공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현실이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순간이다.

   그런 식으로 구체화되고 성장하게 된 우리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유/무형의 폭력에 대한 암묵과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사회간의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폭력성을 갖추고 있다. 폭력은 타자를 배재하고 제거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안전을 획득하는 일이다. 톰 스톨, 아니 조이 쿠삭이 리치 쿠삭을 향해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이상한 장면이 아니다. 불필요한 장면도 아니다. 전쟁. 전쟁. 전쟁. 톰 스톨은 전쟁이 끝난 후 총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린 딸이 접시를 내주고, 머뭇거리던 아들이 빵을 준다. 자, 여기에 폭력이 정당화되어 사회적으로 건전하게 편입되어가는 과정이 있다. 이 장면이 감동적인가? 이 장면은 정말이지 무서운 장면이다.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버리고 돌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로 읽어내리기에는 함의된 내용이 너무나 ㅎㄷㄷ하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폭력의 화신이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경악스러운 마지막 장면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커피숍을 운영하던 영화 초반 톰 스톨의 모습으로 회귀한다. 폭력은 사회 속으로 암묵적 합의를 통해 스며들지만, 언젠가, 언젠가, 또다시 두 갱이 들이닥치는 순간 정당방어의 이름으로 폭발하게 될 것이다. 아들은 그것을 보고 누군가를 두들겨 팰 것이고, 악당을 향해 샷건 방아쇠를 당길 것이며, 딸아이는 외눈박이 갱스터의 시선을 받게 될 것이고, 남자들은 아내들을 두들겨패며 섹스할 것이다.




사족.

오늘 다른 컴퓨터로 내 블로그를 봤더니... 아니 맑은고딕 글씨체가 깨져 보이는 거다. 눈에도 좋지 않겠더라.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맑은고딕이 지원되지 않는 모니터가 있는 모양이다. 해서, 한동안 문제가 해결될때까지 전에 그랬듯이 돋움체로 포스팅하려 한다. 맑은고딕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미안.






이글루스 가든 - 내맘대로 영화해석
폭력의역사, 영화
# by 환자 | 2008/09/02 00:51 | 영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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